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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차나 한 잔>

 글에도 잔상이 있다. 글의 잔상은 자극적인-야하거나 잔인한- 글보다, 잔잔한 글 저변에 날선 감정이 깔려있는 편이 오래 간다. 차나 한 잔이 딱 그런 책이다.

 60년대에 출판 된 책이다. 내 아버지가 63년생이시니 아버지 4살 때 나온 책이다. 아직 27살의 나에겐 아마득한 시간이다. 하지만 글과의 거리감은 특히 그 감정은 너무도 가깝게 느껴진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비해 인간의 감정이란 발전도 퇴보도 없다.


인간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 그게 아녜요. 형편이 나아져서가 아녜요. 아내가 말한다. 그럼 뭐야. 그렇군, 형편이 더 나빠져서군. 돈 때문이니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건 돈이니까. 아녜요. 슬픔 때문예요. 종말에 대한 슬픔이 섹스를 만든 거예요. p.15

어쨌든 속눈썹을 떨며 내 눈을 응시하던 그 여자의 눈길은 내 운명을 결정했다. 그 순간에 나는 그 여자를 사랑해 버린 것이었다. 마음과 마음의 가장 빠른 지름길은 마주치는 눈길이었구나고 생각하며 나의 술 마셔 붉은 얼굴은 얼굴은 더욱 붉어지며 이마로 진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p.20

신이 없는 두 꼭지점만의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란 이기적으로 무한히 탐욕적인 동물적 사랑에 지나지 않아. 어느 한편이 상대를 잡아먹고서야 끝나는 투쟁에 지나지 않아. 끝나고 괴로운 투쟁이지. 왜냐하면 상대를 잡아먹어 버렸으니 남은 건 고독한 자기라는 말야. p.29

나라고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이전의 나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물론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전에도 항상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이건 내가 아니고 이전의 내가 나라고 한다면 이전의 나는 그 이전의 나를, 그 이전의 나는 그 그 이전의 나를... 그리하여 나는 무(無)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건 내가 아니라고 하는 바로 내가 나임을 나는 안다. p.31

도망할 수 있는 사람과 욕구는 있지만 그러지 못하고 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p.43

그야말로 '어쩌다가'의 연속이었다. 그는 자기가, 지난 날 우연 속에 자신을 맡겨 버린 것이 갑자기 역겨워졌다. "거지 같은 자식이었다."하고 그는 자신을 욕했다. 손톱만큼이라도 좋으니 나의 주장이 있었어야 할 게 아닌가. p.66

시선을 아내의 얼굴로 돌렸다. 언제 보아도 귀여운 얼굴이었다. 이렇게 옆으로 누워서 보면 마치 전연 알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그에게는 꽤 재미있었고 야릇한 흥분조차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p.67

그는 갑자기 꽥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아내와 함께 밤늦도록 거리를 쏘다닌다면 좋겠다. 쇼윈도라도 보면서, 그래 쇼윈도라도 보면서. p.97

어두운 공간 속에서 영원한 소년으로 살아 있게. p.100

날 수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날 수 있는 것으로서 동시에 내 손에 붙잡힐 수 있는 것이니까요. p.104

추억이란 그것이 슬픈 것이든지 기쁜 것이든지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을 의기양양하게 한다. 슬픈 추억일 때는 고즈넉이 의기양양해지고 기쁜 추억일 때는 소란스럽게 의기양양해진다. p.105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나는 말했다. p.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