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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준 <저, 죄송한데요>

프리랜서로 산다는 것. 얼마나 꿈만 같은 일인가. 내가 일어나고 싶을 때 눈을 떠, 모닝커피 한 잔 마시는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로망 가득한 직업이다.

하지만 현실은 점심 느즈막에 눈을 떠 라면을 끓여먹고 핸드폰을 뒤적이다 뒤늦게 마음이 급해져 새벽까지 작업에 허덕이는 것이 일상이다. 매일이 불안하고 일이 끊기게 된다면 하루의 불안감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다시 상상해도 끔찍하다. 정말 능력있는 프리랜서가 아니면 보통 직속 회사가 하나쯤 있어야 안정적인 생계를 가질 수 있다. 나는 안정적인 월급쟁이의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보통 수요일 쯤 눈을 뜰 때, '아 그냥 때려 치고 프리랜서나 할까?'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역시나 월급쟁이가 편하다는 위안을 얻었다. 아- 디자이너의 삶 얼마나 고되고 끔찍한가!

가끔 3~4시간씩 저런 고민을 한다. 저, 죄송한데요.가 가장 죄송해보이는 쉼표와 마침표를 찾아라!

디자인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던 사람이면 한 번 쯤 읽어보기 좋은 책이다. 왼쪽 페이지는 주석이 오른쪽은 내용이 있는 구성으로 두께에 비해 더 빠르게 읽힌다.


누구는 돌길을 좋아하고 누구는 흙길을 좋아하지요. 하지만 그런 차이가 서로에게 매력으로 작용하지 않나요? p.19

여러 사람을 통해 검증된 곳만 다니면 별로 재미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좋다고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보다는 저만의 풍경을 찾고 싶습니다. p.19

인터넷으로 뭘 살 때마다 각종 '동의' 버튼을 눌러야 하는 것처럼요. 말이 '동의'지 동의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데 그게 어찌 동의란 말인가요. p.41

제가 만든 로고와 사용자의 감각이 전혀 어울리지 않은 것이지요. 단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간절히 바라는 일을 막기는 싫었고요. 어쨌든 가게 주인인데, 자기 뜻대로 꾸려 나가지 못한다면 주객전도지요. 주인장 곁에서 영원토록 간섭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지정한 색상을 기계적으로 쓰게 하고 포맷에 맞춰 안내판을 달게 하는 것이 전문가의 소임을 다하는 일은 아닐 터입니다. 저 역시 신는 사람을 헤아리지 못하고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권한 셈입니다. p.43

셀프서비스 싫습니다. 차라리 서비스 비용을 따로 물리든가요. 따로 물린다면 당연히 그 비용에 합당해야겠지요. P.55

최근에 간 극장에서는 안경 쓰는 사람을 위한 전용 3D 안경을 주던군요. 다리를 없애고 알이 있는 부분만 남겨 각자 자신의 안경테에 걸치는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동그란 제 안경에는 맞지 않아 두 시간 동안 손으로 잡고 보느라 혼났습니다. 전국의 극장에 비치하려면 대량 생산을 했을 텐데 그 정도의 범용성 테스트도 하지 않다니요. 실제로 배려하기보다 그러는 척만 하고 싶었나봅니다. p.65

다 포기하고 혼자 카페에 갔더니 수많은 사람이 일행끼리 모여 앉아 수다 떨며 먹고 마시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들 약속을 잡았을까요? p.89

말하고 나면 후회되고, 그렇다고 말을 안 할수도 없고 말이지요. p.106

배려와 소심함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p.113

쓸데없는 회의로 버린 시간만 모아도 다음 생애를 살기에 충분할걸요. 괜히 윤회 얘기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p.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