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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이방인>


고등학교 학창시절, 철학 수업을 들을때 단순히 철학자가 '멋있다.'라는 이유로 좋아했다.

그 중 내가 강렬히 추종하던 알베르 카뮈는 무신론자와 아나키스트로 정치도 종교도 제대로 알지 못하던 나에겐 'cool'의 결정체였다.

나는 그가 남긴 많은 말중 무신론에 관한 얘기를 가장 좋아했다.

"나는 종종 내가 무신론자라고 하는 글을 읽는다. 나의 무신론에 대해 하는말도 들린다. 그런데 이 낱말들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겐 의미 없는 낱말들이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무신론자는 아니다."


종교라고는 기독교라는 일률적인 생각을 강요하던 사회에 당당하게 반항하며 그가 기독교를 믿지 않는것이지, 그것이 무신론자는 아니라는걸 냉철하게 표현해주었다. 

즉 그는 유일신 사상 자체를 꼬집은것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카뮈에 취해 처음 읽은 책이 <이방인>이었다.

감수성 철철 넘치던 시기에 읽기엔 너무 냉철하고 딱딱하고 재미없었다. 꾸역꾸역 끝페이지를 보긴 했지만 무신론자나 아나키스트가 이런 사람이면 절대 만나지 않으리 하며 질색했다.

그리고 올해, 다시 그 책을 펼쳤다.


죽음의 순간 가장 반짝이는 것은 생명이다.





이 책은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나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


뫼르소에게 엄마의 죽음은 단어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단 한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으며 슬픔 또한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양로원에서 오래도록 그의 어머니와 함께 지낸 늙은 남자가 더욱 슬퍼한다. 그는 장례식을 따라가며 쓰러지기까지 하며 뫼르소와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뫼르소에겐 삶이란 것도 생명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떠한 의미조차 없었으리라. 그저 지나가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에게 삶이 가지는 모습이었다.


삶은 진실로 어떠한 의미도 없었으며 충동의 연장선이었다.


그 충동의 연장선 중 바로 '살인'이 있었다.

뫼르소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닌 뜨거운 햇살 때문에 권총의 방아쇠가 당기고 싶어진다. 그렇게 살인을 저질렀다.


살인 후 수감되어 의미없는 삶을 연속하던 그는 '사형선고'를 받게된다. 사형선고는 그에게 수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과거를 추억하며 자신의 방의 모든것을 생각으로 들여본다. 그는 감옥에서 삶에 대해 하나하나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되돌아봄은 반성이 아님 정말 '보다'의 의미다.)


그리고 '감옥에서의 100년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사형이 가까워지고 부사제가 그를 '구원'하러 온다. 죽음 앞에서 절대자를 믿게해 천국을 가게 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뫼르소는 울부짖으며 신을 부정한다. 1) 하나님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2) 그 하나님 때문에 내 남아 있는 삶을 생각하는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다고.

그에게는 신이란것은 정말 없던것이다. 그리고 그 울부짖음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듯 했다.


그리고 단두대에 서는날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행복했다.

세상과 자기가 닮아있음을 느꼈다.


이제 뫼르소는 주체적으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을 행복하게 기다린다.



끝까지 관습도 규범도 적용되지 않은 자신만의 충동으로 삶을 살아가는 인간 뫼르소.

그는 진정한 '이방인'의 면모를 갖춘것 아닐까?


...

이 세계가 나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나는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위하여, 내가 혼자임이 덜 느껴질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유일한 소원은 나의 사형 집행에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죽음이 가지는 의미가 곧 삶이 아닐까 싶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그렇기에 죽음은 소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