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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그나저나 네 난봉도 이쯤에서 끝내야지. 더 이상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테니까."

세상이라는 건 도대체 뭘까요. 복수(複數)의 인간일까요.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 P.84



책의 주인공, 요조. 스물 일곱에 마흔살 같아 보인다는 말로 그의 이야기는 끝이난다.

올해 내 나이 스물일곱, 문득 이 책이 생각나 끄적인다.


<인간실격>은 학창시절에 2번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 2번 총 4번을 읽었다.

얇은 두께에 어려운 단어가 하나 없고 호흡이 짧아, 펴는 순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책의 줄거리는 정말 간단하다.

...

남들이 보기엔 부러워할 번듯한 가정에서 훤칠한 외모로 태어난 요조는 실패한 인생을 산다.

머리도 좋고 재능도 많았으며, 여자들에게 인기도 있었지만 그건 그저 사실에 불과했다.

그는 그것을 좋게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며 당연하게 여겼고 눈치채지 못하기도 한다.


그는 일생을 여럿에게 기대어 산다.

의지없이 살다 모든 것을 잃고, 모두가 그를 외면했을 때.

그의 나이 스물일곱, 마치 마흔같은 외모다.

..


재수없을만큼 눈치가 없는것인지, 아니면 놀라울정도로 당당한것인지 헷갈린다.

하지만 모든것을 다 가진 대신 자기 자신은 잃었다.

그게 그의 삶이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


이 책을 보고 나는<현대병>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현대병은 사전적으로는 빠른 사회발전에 인간은 외면되거나 지쳐 생기는 병임을 지칭하지만,

현대에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취업을 하기 전 부터 포기하는 학생.

남들만큼 살려다 빚만 늘어가는 사회초년생.

정년 퇴직은 가까워지고 살아온만큼 살아갈 날이 남은 50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일어날 일들에 쓸려 의욕을 잃는다.

"괜찮아. 모두 그래."는 위로가 되지 않은지 오래.

가끔 인간임을 포기하고 싶다.


어째..

1948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70년이 지난 지금 말할 수 없이 변한 세상에서 인간 만은 그대로인듯하다.

....

그야 누구든 남이 비난을 퍼붓거나 화를 낼 때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저는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보다도, 악어보다도, 용보다도 더 끔찍한 동물의 본성을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p.16

사람과 접할 때면 끔찍한 침묵이 그 자리에 나타날 것을 경계하느라 원래는 입이 무거운 제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익살을 떨었던 것입니다만, 지금은 호리키 이 바보가 무의식적으로 그 익살꾼 역할을 자진해서 대신해 주었기 때문에 저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저 흘려들으면서 가끔 설마, 라는 둥 맞장구를 치면서 웃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p.42

그러나 제가 인간에 대한 공포에서 도망쳐 조촐한 하룻밤의 안식을 찾아 그야말로 저와 '동류'인 창녀들하고 어울리는 동안, 어느 틈인지 저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종의 역겨운 기운이 저에게서 풍기게 된 모양입니다. p.42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 p.56

....

어느 한 구절이 특별하기 보단 책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의 색감이 줄곧 이어지는 책.

#쏜살에디션 #민음사쏜살